written by 박두영(한국과학재단 연구원,前한국과학재단스톡홀름 사무소장)
스톡홀름, 요람에서 무덤까지, 노벨상의 이미지로 대표되기에는 불충분한 나라 스웨덴. 발전이 더딘 복지국가인 것 같은데 수많은 글로벌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고,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나라 스웨덴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스웨덴의 광고를 이해하기 위해 ‘스웨덴다움’에 대한 다양한 탐구가 필요한 이유다.
대중에게 스웨덴에 대한 이미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 정도로 인식된다. 또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웨덴은 셀시우스 온도계, 프로펠러, 현금 지급기, 진공청소기, DOHC 엔진, 볼베어링, 지퍼 등 수많은 발명품을 내놓은 과학의 나라기도 하다. 그리고 스웨덴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디자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삶을 파고드는 스웨덴 제품 덕분에 ‘스웨덴=디자인 강국’의 이미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북유럽의 혹독한 기후와 낮은 인구밀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온 스웨덴의 역사를 헤아려보면 화려함보다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특성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스웨덴적인 우아함(Swedish Grace)을 잃지 않는 간결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탄생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스웨덴 디자인 철학을 닮은 광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웨덴 브랜드 제품을 살펴보면 스웨덴 디자인의 미학을 실감할 수 있다. 스웨덴의 가전제품·자동차·가구 등 모든 제품의 특징은 한마디로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에 있다. 볼보와 사브 자동차가 그렇고 이케아 가구와 H&M 옷도 그렇다. 그중에서도 이케아는 스웨덴의 디자인 특성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다.
사실 이케아는 가구의 재질 면에서만 보면 그리 눈길을 끌지 않는다. 고급 브랜드가 아니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된 것은 묘하게 눈길을 끄는 디자인 덕분이다. 중저급 소재에 상급 디자인을 입혀놓았다고 보면 된다. 모던한 디자인을 폭넓은 인구층에게 제공한다는 이념을 기반으로 설립된 기업은 어느덧 전 세계인을 매혹시키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건축에도 반영되어 스웨덴의 랜드마크가 된 터닝토르소(Turning Torso)와 같은 건물을 낳았다. 가능한 한 많은 햇빛을 받기 위해 아파트를 최대한 비틀어놓았는데, 실용성을 중시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가장 스웨덴다운 건물로 꼽히고 있다.
스웨덴의 광고도 이러한 디자인과 많이 닮았다. 비주얼이 화려하지도 않고 광고가 주는 메시지도 간결하지만, 느낌은 강렬하고 여운도 무척 오래간다. 스웨덴 광고의 특징을 네 가지 키워드로 표현하면 기발한 착상, 간결한 메시지, 단순한 색상, 강한 인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스웨덴 광고시장을 이해하려면 스웨덴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알 필요가 있다. 스웨덴은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매우 재미없는 나라다. 우리나라가 재미있는 지옥이라면 스웨덴은 재미없는 천국이라고 할까. 대학 진학률이 40%를 밑돌고 사회 전반적으로 경쟁이 치열하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기업과 브랜드의 경우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기업이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는 것과 달리 스웨덴은 제품의 종류도 많지 않고 광고를 하지 않는 상품도 많기 때문에 광고시장 자체가 크거나 경쟁이 심하지 않다. 특히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 광고가 많지 않은데, 이는 스웨덴뿐 아니라 핀란드·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의 특성이기도하다. 이러한 것은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필요한 사람이 알아서 사라는 자존심이 결합된 결과다.
거기에 복지국가의 울타리에서 더 많이 벌어보았자 세금으로 떼어가니 적당히 벌고 인생을 즐기자는 풍조도 한몫했을 터.
이러한 풍습이 최근 세계화와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변하고 있다지만 스웨덴 기업들은 여전히 광고에 막대한 비용을쏟아 붓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웨덴은 신흥 광고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양적인 면보다 질적인 면에서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 최근 세계화와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변하고 있다지만 스웨덴 기업들은 여전히 광고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붓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웨덴은 신흥 광고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양적인 면보다 질적인 면에서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튀지 않게, 그러나 강한 인상을 남겨라
스웨덴은 오래전부터 중간광고를 시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스웨덴 사람들 모두 막간의 광고 시간에 채널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즐긴다는 사실. 가령 영화 한 편을 보려면 보통 대여섯 차례의 광고를 보는데 웬만해선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필자는 스웨덴 생활 초기, 광고를 할 때마다 채널을 돌리다가 촌스럽다는 핀잔을 들었을 정도다. 그들이 ‘광고는 드라마를 보는 대가!’라는 순진한 생각에 광고를 보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보다 인내심이 많아서는 더 더욱 아니다. 채널을 돌리지 않고 광고를 시청하는 이유는 그저 광고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람이 소박하고 내성적이라는 일반성을 고려하더라도 재미없는 광고에 과감히 채널을 돌리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광고가 재미있는 데는 튀는 것을 싫어하는 독특한 국민성도 크게 작용했다. 스웨덴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말 중에 ‘Swedish Jealousy’, 즉 ‘스웨덴 사람의 질투’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이웃 사람과 내가 비슷한 수준과 생활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보다 못 사는 것도 경계하지만 크게 유명해지거나 튀는 것도 꺼린다. 스웨덴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필자는 교민에게 “스웨덴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이곳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그러니 절대 겸손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리고 스웨덴에 살면서 그 말을 몸소 실감했다. 이러한 국민성을 반영하듯 스웨덴의 광고도 화려한 비주얼이나 CM송을 이용해 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스웨덴 기업은 화려한 기교보다 재미있는 스토리와 뛰어난 크리에이티브를 통해 소비자의 주목을 끌기 위해 노력한다. 1분간의 짧은 광고 안에서도 반전의 요소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화려한 애니메이션이나 3G 효과 대신 동물이나 자연 경치를 주로 활용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설명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처럼 스타급 연예인으로 요란하게 주목을 끄는 광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스웨덴에서는 연예인이나 유명 정치인이 거리를 지나가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쳐다보지 않는다.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다. 튀는 주인공, 현란한 광고 기법, 귀를 사로잡는 CM송, 이 모든 것을 빼고 스토리로 승부하라! 이것이 바로 스웨덴 광고다.
보는 재미가 남다른 스웨덴 광고
최근 몇 년 동안 스웨덴 TV에서 본 광고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광고는 금연 보조제 니코레트 껌 광고다. 공원 벤치에 노인 두 명이 앉아 있다. 그중 한 명이 니코레트 껌을 씹고 있는데 미니스커트 차림을 한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각선미 를 자랑하며 벤치를 지나가다가 노인에게서 나는 껌 냄새를 맡고 그 노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갑자기 노인에게 한참이나 강렬한 키스를 퍼붓는다. 그 장면을 부러운 듯 쳐다보던 옆에 앉은 노인은 친구의 주머니에서 니코레트를 슬쩍 훔친다.
그리고 긴 키스를 끝낸 미모의 여인은 홀연히 노인 곁을 떠나간다. 두 노인은 여인이 떠나가는 모습을 너무 아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광고는 끝난다.
이 광고는 대사도 배경음악도 없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짧은 카피가 전부다. 노인과 젊은 여인의 키스 장면을 이용해 강렬한 인상을 주고 간결하면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스웨덴 광고의 특성을 볼 수 있다.
볼보 타이어 광고도 흥미롭다.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 중인 남자. 주차장 여러 층을 돌았지만 빈자리가 없다. 깊게 한숨을 쉬던 남자는 빈 벽을 발견한다.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과 손을 잡고 주차장을 걸어 나오는 남자. 그리고 다음 장면은 자동차가 주차장 벽면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볼보 타이어가자동차를 벽에 붙일 수 있는 만큼 그립이 좋다는 뜻이다. 짧은 광고 안에서 유머로 가득한 반전을 보여주는 것은 스웨덴 광고가 가장 즐겨 활용하는 기법이다.
스웨덴의 대표 브랜드인 이케아 광고도 빼놓을 수 없다. 이케아 역시 스웨덴의 다른 광고와 맥락을 같이한다. 2007년 진행된 ‘everybody’s going home early’ 캠페인은 특히 흥미롭다. 이케아 제품이 도착하는 날, 사람들이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광고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랑을 사랑했다며 술에 취해 ‘깽판’을 놓는 여자 손님. 밖으로 쫓겨나자마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향한다. 지루한 피로연을 벗어나 이케아 가구로 가득한 집으로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다른 광고에선 패션쇼에서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이 집에 가고 싶어 잰걸음을 하고 포즈를 취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을 담았다.
기대되는 스웨덴 광고의 미래
춥고 작은 나라지만 한 세기만에 가난한 농업 국가에서 현대화되고 세련된 국가로 발전하는 저력을 보여준 스웨덴.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단정한 스웨덴 사람이지만 그들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세한 미적 감각과 숨길 수 없는 끼는 지금의 산업 국가 스웨덴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스웨덴다운 광고가 탄생했다.
이렇듯 스웨덴 광고는 스웨덴의 역사·문화·국민성을 총체적으로 껴안은 채 그 정체성을 만들어왔고, 구시대적 고루함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오묘하게 섞여 현재의 광고들로 표현되고 있다. 적은 인구가 수많은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세계적인 디자인 강국으로 발돋움한 모습은 앞으로 스웨덴 광고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기대감을 더해준다. 5년 후, 10년 후에 스웨덴 광고계가 보여줄 변화상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