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기 스페이스오디티 대표
“저희 팀 막내가 케이팝 전문이어서 미팅에 함께 왔어요. 요즘에는 덕질 안 하면 일도 못하겠더라고요”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는 케이팝 팬들을 위한 모바일 앱 ‘블립’과 케이팝 업계 종사자를 위한 팬덤 데이터 대시보드 사이트 ‘케이팝레이더’를 운영하고 있다. 팬덤을 주로 다루는 업을 하다 보니 다양한 관련 미팅을 요청받게 된다. 그때마다 나오는 멘트가 “케이팝을 잘 몰라서” “덕질을 해보지 않아서”이다. 사실 누가 알았겠는가. 예전엔 하찮게 여겨졌던 ‘덕질’이 ‘미래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과거엔 전국 수능 만점자가 인터뷰에서 “HOT가 누구예요?”라고 말하던 시대였다면, 이제는 수능 만점자들이 유퀴즈에 출연해서 각자의 최애 아이돌 멤버를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케이팝은 예전처럼 특정 타겟만 즐기는 하위문화가 아니다.
(출처 : 셔터스톡)
잘파 세대들에게는 마치 서로 MBTI를 묻듯이 ’너는 최애가 누구야?’라고 묻는 필수 항목이 되었고, 최근 전국 각지의 아트박스나 초등학교 앞 무인 문방구에서는 K-POP CD를 판매하고 포토카드 꾸미기 등 다양한 덕질 용품 코너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또 여의도 더현대를 비롯한 여러 대형 핫스팟은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팝업 스토어와 행사를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마케팅의 치트키. 케이팝과 팬덤
케이팝 아티스트와의 콜라보가 중요한 건 단순히 ‘유행’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엔 정해진 매체비로는 엄두도 낼 수 없던 일들이 케이팝 덕분에 가능해졌다. 아티스트 채널에 올라가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팬들에게 정확하게 조준되어 브랜드가 원하는 소식을 전달할 수 있고,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보를 퍼 나른다.
또 팬들은 기발한 밈을 만들어 브랜드와 관련된 2차, 3차 콘텐츠를 퍼뜨리고, 필요한 이상으로 제품을 구매해 ‘돈쭐(돈으로 혼쭐을 내다, 즉 많이 구매해준다는 뜻의 신조어)’을 내주니 마케팅에서는 이만한 치트키가 없다. 마케팅에서 케이팝과 덕질은 이제 필수 덕목이자 경쟁력이 되어버렸다.
(출처 : 셔터스톡)
머리로는 결코 이해가 안 되는 세상
하지만 브랜드 입장에서 팬들과 소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세계는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오지 않는 아이돌 멤버의 생일 카페를 주최하기 위해서 혼자 3~400만 원의 돈을 들여서 평균 3~4개월의 시간 동안 준비하는 팬들, 수백만 원어치의 CD를 결제하며 ‘실물은 받지 않습니다’라는 옵션에 체크 버튼을 누르는 팬들이 있다.
관심 없는 이에겐 다 똑같아 보이는 외모와 똑같이 들리는 노래다. 신인 아이돌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눈만 뜨면 새로운 정보와 이슈가 발생한다. 세분화된 취향에 따른 각자 자기만의 세분화된 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평소 관심 없던 케이팝과 덕후를 이해하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조직 내 의사결정자들에게 설명해야 할지는 더 막막하다.
덕질연구소 소장의 팁 대방출
개인적으로 수십년 동안 ‘팬’의 삶을 살아오기도 했고, 지금은 ‘팬덤’을 주제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입장으로, 그동안 경험과 데이터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팁들을 비(非)덕후인 독자들을 위해 공유하고자 한다.
STEP 1. 정량 데이터로 확인하기 “요즘 누가 인기 있나요?”
BTS와 블랙핑크 다음으로 누가 인기가 많은가? 굉장히 간단한 문제 같지만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이 인기 순위를 정리한 곳도 없으며 인기 기준이 무엇인지 또한 애매하기 때문이다. 아래 3번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숫자가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는지에 따라 다른 것이 팬덤이기도 하다.
케이팝 팬덤을 분석하며 느낀 건, 인기 변화가 정말 빠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과 해외의 인기도 확연히 다르다. 케이팝 소비에서 보통 한국이 10~15%를 차지한다면, 나머지 85~90%는 해외 소비다. 우리가 체감적으로 인지하는 인기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글로벌 인기와 차이가 날 수 있다. 또 하나 케이팝 팬덤에도 롱테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3~4년 전엔 인기 있는 5~6개 팀이 케이팝 인기의 절반을 차지했다면, 이제는 수십 개 팁이 인기를 나눠 갖는다. 특히 5세대 아이돌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요즘은 기업들은 저평가된 우량주를 미리 발견해서 선점하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STEP 2. 팬덤 서베이 “우리랑 잘 맞는 팀은 누구일까요?”
인기 아티스트를 섭외하는 것이 항상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많은 브랜드가 이효리의 SNS에서 댓글을 통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몇몇 브랜드는 이효리를 모델로 기용했지만, 결과는 서로 달랐을 것이다. 아티스트의 이미지와 캐릭터, 서사가 우리 브랜드의 방향성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며, 스토리텔링과 크리에이티브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도 이를 체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체감적으로 그렇게 인식하지만, 실제로 많은 케이팝 팬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충분히 다수의 팬에게 물어보고 답을 구해야 한다. 비슷해 보이는 ‘용감한’ ‘쾌활한’ ‘독창적인’ 등 비슷해 보이는 걸그룹이라도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 같은 그룹 안 멤버라도 아티스트 별로 서사, 콘셉트, 세계관이 다르다. 특히 공식 영상이 아닌 무대 아래 일상에서 보여주는 모습 역시 아티스트의 이미지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에, 아티스트 이미지에 대해 팬 대상으로 조사를 한 후 섭외를 진행하는 것이 좋다.
(출처 : 셔터스톡)
STEP 3. 팬 분포 확인하기 “그 팬덤은 어떤 팬덤이야?”
얼마 전, 유퀴즈에 하이브 방시혁 의장이 직접 출연하여, 코어 팬이 너무 많은 케이팝의 팬덤 구조가 위기라며, 라이트 팬이 많은 구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 이런 케이팝의 구조는 케이팝 아티스트의 인기도를 발매 후 1주일 동안 판매된 음반 수 즉 ‘초동’으로 평가하는 탓에 발생한 현상이다.
음반 안에 멤버별로 랜덤으로 들어 있는 포토카드 시스템, 음반을 제일 많이 구매한 순서로 입장시켜 주는 사인회 탓에 팬 한 명이 앨범 수십 장, 수백 장을 구매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실제 팬 숫자를 확인하기보다 판매된 음반 숫자에 집착하다 보니 정확한 고객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팬덤의 형태는 다양하다. 콘텐츠를 보며 시간만 쓰는 ‘눈팅형’을 시작으로 음반 1장을 구매하며 실제 돈을 지불하고 덕질을 하는 ‘구매형’, 그리고 시간과 돈뿐 아니라 실제 이동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팬 활동을 하는 ‘활동형’, 아티스트의 성장과 팬덤의 발전을 위해 재능과 돈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생산형’ 등으로 이뤄져 있다.
아티스트가 데뷔하고 성장한 스토리나 아티스트의 활동 방향성에 따라 아티스트별로 팬들의 구성과 성향이 달라진다. 즉, 아티스트 팬덤을 하나의 객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STEP 4. 인터뷰와 분석을 통해 디테일 다지기 “팬들은 어떻게 생각해?”
아래는 온라인 서베이를 통해 각 아티스트의 팬들에게 왜 그 아티스트를 좋아하는지를 꾸준히 물어보면서 얻은 결과들이다. 비슷한 팀처럼 보여도 팬들이 좋아하는 포인트는 엄연히 다르다.
어떤 팀은 퍼포먼스와 무대를 보고 팬이 된 경우가 절반 이상인 반면, 어떤 팀은 자체 예능 콘텐츠에서 보고 팬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버추얼 아이돌’의 대표 주자 ‘플레이브’의 팬들에게 왜 ‘가상’임을 알면서도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는데, 놀랍게도 답은 인간미였고 그 다음이 음악성이었다.
그렇다고 이 내용으로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다. 모든 아티스트와 팬들 사이에서는 그들만의 언어와 약속이 존재한다. 서로 부르는 이름이 존재하고, 멤버별 닉네임은 계속 바뀐다. 보컬, 랩 같은 멤버들의 공식 역할 외에도 멤버별 캐릭터나 케미 조합 등이 비공식적인 면도 있다. 각 요소가 만들어내는 아티스트와 팬들 관계는 마치 생명체와 같다. 늘 변하는 팬덤을 면밀하게 들여다볼수록 성공 요소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셔터스톡)
팬들에게 축제를 열어주세요
지난해 미국의 음악 시장 분석 회사인 루미네이트는 스포츠 팬보다 음악 팬들이, 음악 팬 중에서 케이팝 팬들의 소비력이 월등히 높다는 결과를 공개했다. 그런데 고맙게도 케이팝 팬들은 소비력뿐 아니라 브랜드에 빠지면 더 열렬히 사랑하고 열심히 생산자 역할을 자처하니, 이만큼 매력적인 고객들이 있을까?
이 고마운 팬들은 하지만 무섭게도 예민하고 똑똑하다. 누가 이용만 하려고 하는지, 진심으로 위하는지 매서운 감각으로 구분해낸다. 팬덤을 활용하려고 할 때 팬들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며, 브랜드가 콜라보 캠페인을 하나의 즐거운 축제처럼 열어 주길 제안한다. 축제에 초대받은 팬들은 브랜드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김홍기 스페이스오디티 대표
20년 넘게 음악 업계에서 팬을 만들고 유지하고 확장하는 일을 해왔다. ‘좋은콘서트’에서는 싸이, 이문세, 이소라 등의 콘서트를, 서울음반에서는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를, 네이버와 카카오에서는 조용필, 서태지, 지드래곤 등의 온라인 생중계를 만들고 마흔이 넘어 스타트업 씬에 도전하여 딩고뮤직을 만들어 이슬라이브, 세로라이브를 런칭했다. 현재는 음악 스타트업 ‘스페이스오디티’ 케이팝 스케줄 No.1 앱 ‘블립’과 데이터로 팬들의 규모와 변화량을 보여주는 ‘케이팝레이더’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