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ㅣ제일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jeahang.park@cheil.com
한 스포츠신문사에서 스포츠나 연예방면에서 남녀 각 한명씩 스타들을 섭외하여 그들을 서로 대비시키면서 집중 조명하는 코너에 우리나라 남녀 프로농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두 선수, 바로 이상민과 전주원 선수가 주인공이 되어 나온 것을 재미있게 보았다.
20대 후반만 되어도 노장 소리를 듣던 1980년대라면 진즉에 현역에서 물러나 있을 터인데, 이 두 선수는 여전히 가드로서 팀 공격의 출발점이 되는 중심 선수로 활약하고 있고, 모범적인 생활과 준수한 용모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두 선수에게 백문백답식의 질문을 여러 개 한 것이 특집기사의 한 부분을 장식했는데 다음의 질문은 놀라움을 뛰어 넘어 충격적이고 아주 씁쓸했다.
<질문>어릴 때 농구 못한다고 많이 혼났다?
>> 이상민 YES / 전주원 YES
* 이상민: 초등학교 때 시작한 후로 고등학교 때까지는 맞고 뛴 기억만 난다.
* 전주원 : 초등학교 5~6학년 때 평생 맞을 것 다 맞았다. 매일 멍들어 있었다.
- 2009.6.3 <스포츠 X&Y>, 일간스포츠 -
질문은 “농구 못한다고 많이 혼났다?”인데 ‘못한다’는 것에 대한 언급은 없이 둘 다 그냥 ‘맞았다’는 얘기만을 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거의 선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재능을 선보였다는 그들이 그랬을진데, 다른 선수들은 어떠했을까?
폭력의 시대
운동선수들엑게 더 심하기는 했지만 예전 학교에서는 무지하게 때려댔다. 어느 날 후배들과 가벼운 술자리를 하는데, 많은 술자리 대화가 그렇듯이 중고교 시절 얘기가 안주거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학교 내에서의 폭력이 화제에 올랐다. 학교 내에서의 폭력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고 폭력의 양상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전교조 1세대가 겪은 몰상식은 어찌 보면 정권 차원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청책 차원에서의 결정이 어른들 간에 극단적인 대립양상을 띠었고, 학생들엑게는 어느 한 편에 설 것을 강요하는 정신적,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시작하여 시대를 거스르면서 지방 도시에서의 학교 간 이유 없이 라이벌 대립과 그에 따른 다툼의 얘기가 이어졌다. 정말 어찌 보면 작은 동네에서 왜 그리 서로 잡아먹지 못하여 안달이었을까? 하긴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안에서 학급끼리의 라이벌 의식이 살벌한 패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 중의 하나인 <먼 북소리>를 보면 로마 근처에 있는 ‘메타’와 ‘산 사비로’라는 두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서로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서로 걷는 모습도 다르고, 복장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세계관도 전혀 다르다는 동네 사람들 얘기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탈리아라는 나라와 그 사람들은 정말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이해하기 힘든 대상임을 실감한다. 그러니까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라이벌 관계라는 것은 그 대상 지역이나 인구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사람의 고유한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 후반을 배경을 했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무대가 되었던 학교를 나왔던 내게 4년 후배뻘 되는 친구는 그런 학원에서의 폭력에 차라리 초연한 편이다. 다른 친구들을 보며 너희들이 실제 어떠했는지를 어찌 알겠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보며 얘기했다. “우리가 어찌 겪었든, 형네 시절의 폭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걸?”
실제 심했는지 정도야 그들이 겪었던 수준을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모르겠지만, 지금은 서울산업대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예전엔 정말 무식하게들 때렸어요. 국민학교 때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고 교단 있는데로 노트를 가지고 와서 쓰는 애들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떠든다고 그냥 발로 머리를 짓밟고 그랬어요. 근데 애들은, 정말 어리고 어린 애들인데 그러려니 하고 당연시 했지요. 묵묵히 계속 필기하고…”
말씀을 하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거의 화도 내지 않으신 극소수의 선생님들 중 한 분이셨다. 과거에 나이를 불문하고 행해졌다는 엄청난 폭력 얘기는 다른 선생님께 얻어맞고 씩씩대는 애들을 달래시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문제는 폭력을 휘두르셨던 많은 선생님들도 똑 같은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들은 자신의 폭력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리고 학원을 넘어서 선생님들께서 겪으신 어린 시절의 거대한 폭력의 절정체인 전쟁 얘기를 함께 붙이시곤 하셨다. ‘공산당 놈들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식으로 시작되는 추억의 재생인지 푸념인지 모르는 얘기들이 넋두리처럼 이어지곤 했다.
맞는 우리도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게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더 심하게 나아가면 우리는 그런 시절에 태어나지 않아서 그래도 운이 좋다고까지 생각하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교단으로 나아간 친구들은 선생님의 지위에 올라갔을 때 똑 같은 형태의 폭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예전의 무시무시했던 학원 폭력 얘기를 하면서, 교단으로 나가지 않은 친구들도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옛날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폭력적 행동을 강변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사태는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을 과거에 빗대어서 얘기하는 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폭력이 당한 애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는 것이다. 전주원과 이상민 선수를 매일같이 팼던 초등학교 때의 코치 선생님은 아마도 당신들의 그 때의 체벌 폭력이 그 둘을 대선수로 키워낸 자양분이 되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계실 확률이 크다.
이상민과 전주원 두 선수의 얘기를 하면서 지금도 다른 선수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계실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가장 잘 된 부분을 비추어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폭력 때문에 더욱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었는데 못 되었다든지, 그 때문에 더한 재능을 지니고도 농구의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그런 얘기를 들어도 ‘그 놈은 어차피 안 될 놈이다’라고 말하면 된다.
적의 심장을 쏴라
올림픽 마케팅을 ISL에서 오랫동안 담당했던 마이클 페인(Michael Paine)은 <올림픽 인사이드>란 책에서 브랜드의 역사와 함께 올림픽이 브랜드로서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과거 브랜드는 소유권의 의미였다. 그 후 브랜드는 품질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그 이상을 의미했다. 올림픽 브랜드는 용맹과 정정당당의 의미이다. 동포애, 우정, 평화 그리고 인류 보편적 이해이기도 하다.”
마이클 페인이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올림픽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의 경쟁’이란 물성적인 요소가 브랜드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경쟁’이 단순한 스포츠의 단계를 넘어서 체제의 경연장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올림픽 무대가 세계적인 관심을 끌면서 정치 선전과 행동의 장으로 만들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런 정치적인 갈등과 그에 따른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 올림픽이 1972년의 뮌헨올림픽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뮌헨올림픽이라고 했을 때 ‘검은 9월단’이라는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에 침입하여 인질로 잡고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던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결국 인질로 잡혔던 이스라엘 선수들과 검은 9월단원 모두 폭사하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 그 사건은 어찌 되었건 팔레스타인 문제를 세계인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올림픽에서의 선수단과 시설에 대한 안전 문제가 최우선의 과제로 떠오르면서 올림픽 주최 비용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처음 뮌헨으로 올림픽을 유치할 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자 패전국가로서 독일의 이미지를 떨치겠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냉전의 절정기에서 서방 국가들은 분단국가인 독일에서 동독, 즉 공산권 대비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알리고자 서독의 올림픽 개최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모든 승부가 양 진영의 체제 대결로까지 확대되어 해석이 되었다. 언론들이 어느 진영에 속한 여부를 떠나서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올릴 수 있기에, 더욱 부추긴 측면도 있다. 그런 냉전시대 동서 양 진영의 대결의 장으로서 뮌헨올림픽의 화제가 된 국가가 북한이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당시 3관왕으로 유력시되던 심금단 선수를 포함한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다가, 아버지와의 극적이지만 짧은 상봉으로 ‘이산(離散)’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사건만을 남기고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고 철수했던 북한이 1966년 런던월드컵의 기적에 이어 뮌헨올림픽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북한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사격에서 리호준 선수가 메달을 땄다. 금메달을 딴 것보다 리호준 선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로 더욱 유명세? 탔다. ‘어떤 각오로 임했냐?’ ‘어떻게 경기를 진행했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리호준 선수는 ‘적의 심장을 쏜다는 심정으로 사격대에 섰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스포츠정신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이, 국가 차원에서 스포츠 기계를 양산하고 거기에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공산주의의 무자비함을 알리는 증거로서 서구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리호준의 이 발언은 대한민국에서 반공 교육의 소재로까지 활용되었다. 나 역시 선샘님께서 혀를 차며, ‘공산주의자들이란 그런 놈들이다.’라는 식으로 반공도덕 수업 시간에 전해주신 말씀으로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의 승리가 체제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입증하여 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당시에 우리도 따지 못한 금메달을 북한이 땄다는 것을 얘기해야 하는 제한 때문에 그리 널리 수업 시간에 얘기하고 한국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한국에서 거의 같은 유형의 일이 얼마 지나기 않아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박종길 선수는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부터 1982년의 뉴델리, 그리고 1986년 서울에서 벌어진 아시안 게임으로 대미를 장식하기까지 아시안게임 사격 속사권총 3연패를 달성했다. 그가 처음 금메달을 딴 후, 선수단을 환영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리호준 선수에게 기자들이 한 것과 비슷한 질문을 TV프로그램의 사회자가 했다. 사격선수답게 광채가 나는 눈빛으로 현역 해병대 장교였던 그는 의식을 했는지 여부를 모르겠으나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일성의 눈깔을 맞춘다고 생각하며 쏘았습니다.”
사회자부터 시작하여 선수단과 방청석에서 박수 소리가 나오고 박장대소가 이어졌다. 이후 신문지상에서 그 발언을 어떻게 보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당시 방콕아시안게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던 축구 결승전에서의 남북 공동우승을 큰 형처럼 북한을 봐주어 함께 한민족으로 우승 시상대에 서도록 했다는 방송 보도와 중계에서의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몇 년 후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를 거쳐서, 평택의 카투사교육대에 갔을 때 한 미국인 교관이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사격을 할 때, 과녁이 제인 폰다(Jane Fonda)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면서 방아쇠를 당긴다. 그렇게 하면 백발백중이 된다.”
당시는 제인 폰다가 톰 헤이든(Tom Haydon)이라는 반전운동가 출신의 상원의원과 부부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 교관의 말인즉슨 카터 대통령 시절에 군사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 고생하다가 레이건이 당선된 후 군사 예산을 증가하여 겨우 살만한데 제인 폰다가 군축을 부르짖으며 사사건건 레이건에서 딴지를 건다는 것이다.
증오를 넘어서, 대안을 생각하라
미군 교관은 실제 사격을 얼마나 잘하는지 검증해 볼 기회가 없었으나, 터프 가이로 보이고자 하는 의욕과 자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리호준이나 박종길 선수에게 상대 체제에 대한 증오심은 훌륭한 동시 유발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사격 금메달을 이끄는 유일한 길이었을까?
승부 앞에서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감독인 레오 듀로처는 ‘착한 놈들은 항상 꼴찌야(Nice guys finish last’라는 말을 남기며 자신의 도를 벗어난 행동을 합리화했다.
실제 그런 승부를 떠나서 학교에서의, 그리고 운동선수에 대한 폭력을 떠나 전체 사회에서의 그런 과거의 폭력을 합리화시키면서 현재에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 성장을 이룬 원인으로 전제주의적인 체제와 그를 뒷받침했던 폭력이 리더십이나 사회 안정 등의 용어로 변색되어 거론된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숭배가 마케팅 활동으로 들어와서는 무분별한, 혹은 대안을 생각하지 않은 성공사례 숭배와 벤치마킹으로 이어진다. 요즘과 같이 경쟁의 기준과 그에 따라 시장의 판도와 소비자의 준거가 확확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번 리딩 브랜드면 영원한 리딩 브랜드’이고, 새로운 시도는 오로지 그들 리딩 브랜드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는 논리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안’이라는 말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과거라는 잣대에 의하여 상상력을 억누르는 폭력이 아직도 숱하게 자행되고 있다. 진정한 용기와 터프함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자신의 길만을 주장하는 데서가 아니라 대안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