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은밀하고 위대한 갑의 역변 VS 뚫어야 산다, 을의 진격
처음 그를 만난 곳은 집. 아버지는 갑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법이 되었다. 맛난 반찬도 그의 허락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다. TV 채널도 그의 차지였다. 세상의 모든 어른은 갑, 어린이는 모두 을. 설날마다 떡국을 두 그릇씩 해치운 이유는 허기져서가 아니라 한 번에 두 살씩 나이를 먹을 수 있다는 속설을 믿은 까닭이다. 1년에 단 하루뿐인 어린이날을 기다린 이유는 나머지 날들이 모두 불행했기 때문이다.
학교도 갑이었다. 선생님도 갑이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얻어터졌다. 교문 앞에서 완장을 차고 노려보던 선배도 갑이었고, 선생님이 잠시 교실을 비웠을 때 칠판에 이름을 적을 수 있는 권력을 지닌 반장도 갑이었다. 힘센 녀석들은 모두 갑이었다. 귀갓길에 주머니를 털리곤 했다. 을에서 벗어나 갑의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빨리 늙어야 했으며, 강해져야 했고, 공부를 잘해야 했으며, 키도 커야 했고, 얼굴도 잘생겨야 했다. 그러나 그 길은 멀고도 험했다. 나이를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뤄지는 게 별로 없었다.
세월이 흘러 결국 늙는 것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사이 세상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집 안에서 더 이상 갑이 아니었다. 이제는 자식이 갑이고 아내가 갑이 되고 말았다. 이제 ‘진짜 갑’이되는 방법은 별로 남지 않았다. 화가 난다! 화가 난다! 그래서 술을 마셨더니, 갑이 된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이다. 이처럼 쉬운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인터넷에 접속하니 다시 갑이 된 것 같다. 이처럼 쉬운 방법을 몰랐다니! 이제부터 갑이 된 기분을 만끽하리라. 기다려라, 세상의 모든 갑아.
내 앞에서 갑을 자랑하던 이들이여, 너희를 모조리 을로 만들어주겠노라. 이제 나는 갑이로소이다!
술을 마시고 젊은 여성의 허리를 툭 치면서 ‘열심히 살아서 너도 빨리 갑이 돼라’며 격려도 해주었다. 갑이 되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술도 사줬다. 인터넷에 접속해 각종 자격증을 사진 찍어 올리며 으스댔다. 멋진 문장으로 댓글도 달아줬다. 영광으로 알아, 이것들아. 라면을 맛나게 끓여오라고 큰소리치고, 장지갑을 흔들며 새로운 무술도 보여주었다. 이게 바로 갑의 세상이로구나! 심장이 방방 뛰는구나!
술이 깨고 인터넷 접속을 끊으면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결국 을로 가라앉을 것이 분명하지만, 평생 을로 살아온 내게는 그 잠깐도 꿀맛이다. 집에서 술 마시며 인터넷에 접속하면 나는 다시 갑이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좀비갑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갑을 관계로 뜨겁다. 당신은 갑인가 을인가? 아니면 좀비갑인가
Word by 이도환(칼럼니스트)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휴대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이 땅의 을에게 2013년 상반기는 빼앗긴 봄이었다. 대한민국을 을심(乙心)으로 대동단결시킨 진격의 갑질을 향해 을의 꿈틀거림이 계속되었지만, 을 대부분이 예상했듯 모든 사건은 철컹철컹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콜드 케이스로 남겨졌다.
하늘 아래 이보다 더 명확한 관계는 없다. 먹고사니즘의 우위에서 헤게모니를 휘두르는 자, 이하 갑과 억울함과 서러움의 아이콘, 이하 을. 살면서 한 번 이상 보게 되는 입사 공고에는 슬픈 암호문이 있다.
급여는 면접 후 협의 ▶ 너무 적은 금액이라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 / 가족 같은 분위기 ▶ 너를 가족처럼 막 대하겠다. / 간단한 업무 ▶ 월급을 적게 주겠다. /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를 원함 ▶ 월급을 적게 줘도 참을 수 있는 사람 원함.
경력이 몇 년 차가 되었든 이직 스코어가 몇 점이든 상관없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고 지능형이 된 을도 예외 없다.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돌아온 아내의 유혹에 홀랑 넘어간 변우민처럼, 교묘한 갑의 언어에 속아 결국 효과 빠른 잡코리아를 뒤적이며 진통제를 찾는다. 우유주사급의 마취 성분이 있는 퇴직금도 떨어지고 새로운 직장에서의 이직 적응 기간이 지나면? 다시 꼬깃꼬깃한 업무욕구를 접은 채 을의 굴레로 돌아갈밖에.
우리에게도 갑을 해고할 방법은 있다. 뭉치면 망하고 흩어지면 흥하는 을의 속성을 이용하면 된다. 일단 소속과 이름을 버린다. 꼬질꼬질한 을의 껍데기, 감정 노동자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나면 갑 위의 갑, 슈퍼갑인 소비자이자 잠재 고객으로 변신할 수 있다. 돈 주는 사람이 갑이라면 우리야말로 수백만 기업을 상대하는 갑일 테니까.
을의 얼굴을 씻고 사채업자도 울고 갈 갑질 코스프레를 시작하려고 입구에 들어서면, 지능적인 갑이 미리 쌓아놓은 CS팀이라는 철벽을 마주하게 된다. 진짜 갑을 해치우기 위해선 감정 노동자의 대명사인 저 CS팀의 벽을 뚫어야 한다. 저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싫은 소리 듣는 사람 따로 있다는 인생의 진리가 치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결국 왕이라는 소비자가 되어 불만 고객을 상대하는 을에게 갑질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자. 이 모든 것이 슬픈 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일보 전진을 위한 반보의 후퇴라는 것을!
Word by 권정미(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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